천안함은 양심과 상식과 관심이다. 그중에 제일은 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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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onanham.hwp

cheonanham.doc

 
 

                          반파 7분전 9시 15분 물샌다고 해경에 구조신호 보냈다.
                      어뢰 나 기뢰 맞은것과 물이새는것을 구분 못하는 밥통은 없다.

KBS 뉴 스9.100327.HDTV.XviD.TOP.avi_000921254.JPG

  기관실에 물이 샌 상태로 파도에 오르락 내리락  하면 꺽여서 반파된다.

이해가 안되면 모형 만들어서 수영장에 띄워보면 안다.
(자세한 것은 윗 링크를 클릭하세요.)
인간이 짐승과 다른점은 양심이 있다는 겁니다.
합조단은 공개 토론에 응해야 한다.

by swpaik | 2010/08/21 06:11 | 트랙백

A+ 친일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친일파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친일분자는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이다. 친일부역의 정도에 따라서 A급, B급, C급 등으로 나눈다면 박정희에게는 A급으로는 부족하여 특급 친일파(A+)로 분류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가장 저질적인 친일파가 우리의 대통령으로써 18년간이나 철저한 인권유린에 바탕을 둔 군사파쇼로 통치를 했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를 휼륭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역사학자나 경제전문가들에게서 긍적적인 평가의 대상조차 되기 힘든 박정희가 대중들에게 휼륭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는 분위기에 문제점이 있다고 보며 그 문제점과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역류시키고자 글을 올린다.

그 동안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에 대한 글을 몇 편 올렸지만("너(박정희)의 가면을 벗겨주마 1∼8편" 등) 구체적 친일행적에 대한 글은 올리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친일분자가 우리의 대통령으로써 18년간이나 통치하였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겨울공화국 같은 독재와 반민주, 반인권의 죄상을 묻지 않아도 친일행적 하나만으로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역적 죄인이다.

"변신의 황제"였던 그는 결국 한반도 남쪽에 일본도 흉내만 내다만 천황주의를 완성하였다. 즉, 다카키 천국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반전술, 변장술, 위장술, 둔갑술 등을 이용하여 천황주의를 완성하고 진짜천황이 되었는데 그 과정은 역겨운 구토물 속에서 이루어졌다.

보라!

교사에서 군인으로--- 조선청년에서 일본군 장교로--- 박정희에서 다카키 마사오로--- 다카키 마사오에서 오카모토 미노루로--- 오카모토 미누루에서 다시 박정희로--- 일본군 장교에서 대한민국 장교로--- "빨갱이" 무기수에서 반공의 기수로--- 충성스런 장성에서 군사반란 두목으로--- 육군 대장에서 대통령으로---

박정희는 극과 극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으며-- 그에게는 조국과 민족도, 적과 동지도, 양심과 이념도 단지 "권력의 디딤돌"이었을 뿐이다.

-. 민족과 반민족, 정의와 불의 따위 구분은 깡그리 무시하였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 아무리 반민족이고 불의라도 권력으로 통하는 길만 보이면 돌진했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 기회주의는 그의 처세술이고 천황주의는 그의 사상이었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이제 그의 망령에서 벗어나야 한다.

[ 내용 ]

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 - 혈서(최우수 제국군인)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있던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자진해서 만주군관학교 생도생으로 스스로 들어갔다. 만주군관학교 2기생으로 자원입학(1940년 4월 4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나이 23세. 입교 동기생으로 240중 조선인 12명. 15등으로 입학하였다. 하지만 2기 졸업식에서는 240명중 당당히 1등으로 졸업하였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졸업식 날 다음과 같은 "선서"를 힘차게 낭독했다.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휼륭하게 죽겠습니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이 글귀가 바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이다

이 글귀를 풀이하자면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일본) 보답하고, 나를(私) 죽여서 국가를(公) 받들겠습니다."라는 가미가제식 자폭성 혈서를 쓴 것이다. 이 충성혈서는 한 가지 기록을 갖게 된다.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혈서로 일본천황에 충성을 맹세한 조선사람은 단 한명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뿐이었다. 스스로 자진해서건 강제로건 혈서로 일제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은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②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 - JS표 일본인 준비

만주군관학교를 투철한 친일정신과 열성적 훈련으로 수석 졸업의 영광을 차지한다. 수석졸업의 영광으로 금시계를 선물로 받고 졸업생 대표로 천황찬양으로 가득한 답사를 읽었다.

당시 친일신문〈만주일보 1942. 3. 24〉기사 일부를 인용하면...
[… 빛나는 우등생 오카이(日系), 고야마(日系), 다카키(鮮系-박정희) 등 5명에게 각각 은사상증의 전달이 잇고 폐식 하였다....]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조선인은 대략 제1기∼제7기까지 50여명 정도인데... 이 만주군 출신들은 훗날 대통령, 국회의장, 국무총리, 국방장관, 군참모 총장, 해병대사령관, 군사령관, 군단장, 연대장, 고급 참모등 정부와 군의 요직에서 나라를 이끌어 가는 중요 인물이 된다. 한 마디로 황군들이 나라 조지고 민족정기 좀 먹는 세력이 된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를 지도했던 한 일본인 장교의 말을 들어보면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어느 정도 몸과 마음을 철투철미 하게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하고자 하였나를 알 수 있다.

[ 매년 가을이 되면 군관학교에는 생도 전원이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행군연습을 실시했다. 박정희는 그때 내가 맡은 소대의 제1분대장이었는데, 다른 분대장과는 달리 기합이 들어 있었고, 의욕도 대단했다. 진지공격 연습 같은 때 대단히 어려운 임무가 부여되더라도 박정희는 그 임무를 달성하려는 의욕으로 꽉 차있었다. 박정희는 말수가 적고 속에 투지를 감춘 사나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 라고 진술하고 있다.


③ 완전한 일본인 - JS표 일본인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관례대로 우등생에게 주어지는 일본육사 특전의 혜택을 누리게 된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입학하려고 군관학교 시절 남들보다 철저한 황군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닦고 열심히 공부한 것이다. 일본 육사에서도 진지한 학습태도로 모범생이란 평을 받고 3등이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한다.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육군 대신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이로써 박정희는 완전한 일본인(다카키 마사오)이 되었다. 아니 대일본제국의 군인이 되었다.

당시 일본육군사관학교 교장 "나구모 쥬이치(南雲忠一)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자.

『....다카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페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10.26으로 김재규 총에 맞아 죽었을 때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한 일본 외교관은 이러한 말을 했다.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 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JS(Japanese Standard)표 [일제인]이라는 말인 것이다.


④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

소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일본 본토의 마쓰야마 제 14연대에 처음 배속을 받았으나 진정한 일본군인을 참작하여 만주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모란강 부근의 영안으로 전출되었다가 화북지방의 열하 보병 제8군단에 배속된다.

영안지방 →간도에서 활약한 한인 독립군부대가 북만주로 이동할 때와 노령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서쪽으로 진출할 때에 주둔하던 요충지였다. 열하지구 ⇒ 일본군에 대한 항일 투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항일세력은 팔로군, 군부군, 광복군, 조선의용군, 소규모의 게릴라 (유격대) 등이었다.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이곳에 임관한지 1년만에 중위로 진급한다. 군의 편제상 소대장은 최전선에 배치된다. 여기에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열성적으로 항일부대를 토벌했던 공로로 승진이 빨랐던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소속되어 있었던 부대는 독립군 토벌에 110여회를 출정하게 되는데 과연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양심의 가책이나 동포를 죽이는 행동 때문에 방아쇠를 당기는 행위에 고민을 하였을까?

미안하지만 어림없는 소리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조센징 토벌"이라면 환장을 한 놈이었다.

"조센징 토벌이다. 요오시(좋다)"를 연발하며 출정을 즐긴 놈이다. 이 상황을 좀더 자세히 보자

문명자씨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워싱텅에서 벌어진 일들』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만주군 시절 이야기가 나온다. 1972년 문명자 기자가 어렵게 찾아가서 듣고 기록한 생생한 증언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와 함께 지냈던 어떤 만주군 장교 출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하고 벽력 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이 아닌가."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본질을 알 수 있는 증언이다. 말없는 사나이가 갑자기 고함을 질러대는 것은 발작일까? 기적일까? 어느 쪽이든 "조센징 토벌"이란 명령을 받으면 자기도 가눌 수 없는 흥분 상태에 빠진 것만은 분명하다.

"요오시"란 말은 우리말 "좋다"와는 어감이 다르다고 한다. "요오시"는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요오시(좋다)! 토벌이다."라고 고함을 지러대는 행동에는 "조센징을 반드시 내 손으로 때려잡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만방에 선포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은 강렬한 의지와 충성심에 불타는 "조센징(독립군) 토벌"에 대한 결연한 의지와 신념을 보여주는 행동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⑤ 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활약 - 간도특설대

일본은 만주 서남부와 중국북부에 투입할 용맹한 부대를 선발하여 특수부대(철석부대)를 만든다. 여기에 조선인 부대인 [간도특설대]도 선발되는 영광(?)을 얻는데 그 속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이주일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중국북지(열하성 만리장성 남방 평곡-북경 동북방)로 투입되어 항일 세력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여기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소수민족들의 특수부대는 많았다. 조선인의 간도특설대, 러시아인의 찬야부대, 몽고인의 기야부대, 회교인의 회교부대, 오르치온족의 공작대 등이 있었는데....

간도특설대가 가장 강력했다고 한다. 한가지 예를 들면 「일본군, 만주군이 못해내는 작전을 간도특설대가 가서는 거뜬히 해치우곤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조선인 공적평가에 인색한 일본인들도 간도특설대에 대해서는 "상승의 조선인부대" 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소속한 특수부대(간도특설대) 요원들이 얼마만큼 항일군의 토벌에 커다란 공을 세웠는지를 대변해주는 이야기이다.


⑥ 변신의 달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보통학교 교사에서 만주군 지원 입대... 만주군관학교의 수석졸업과 금시계의 영광... 3등으로 졸업한 일본육사 생활도... 만주에서 관동군으로 복무하며 항일세력을 토벌하던 생활도....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날아가 버린다.

친일파 아니 일본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는 어떤 행동을 하였을까? 일본의 지배는 영원 할 것이라고 생각한 박정희에게는 일본의 항복은 대단한 쇼크였을 것이다. 패잔병의 낭패감과 극한의 절망에 빠졌으리라.

하지만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누구인가 변신의 천재가 아닌가? 절망도 잠시였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곧바로 변신을 시도한다. 그토록 노력하고 공들여 입은 황군의 군복을 벗어 던지고 민간복으로 같아 입고 만주군의 부대를 탈영하여 피난민으로 가장하고 피난민 대열에 끼어 들어 북경으로 들어가 광복군에 합류한다.

우리는 여기서 유리한 상황에만 빌붙는 기생충 같은 기회주의자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이것뿐만 아니다. 후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좌익계열의 장교가 되지만 여순 사건으로 불리해지자 천명이 넘는 동료들을 밀고하여 죽음으로 몰아 넣고 자기만 살아 남는다.

박정희가 좌파가 되는 행동에 대하여 조갑제 등은 형(박상희)의 죽음과 연관 시킨다. 그 충격으로 좌파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근거도 없고 설득력도 없는 주장이다. 박정희는 다만 유리한 상황에 편승한것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당시 한반도 상황은 미국 정보의 데이터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한반도는 온통 붉은색(좌파)으로 뒤덮고 있었다. 박정희는 그러한 권력의 흐름이 어디에 있는지 간파하고 그것에 편승했을 뿐이다.

하여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자기 혼자 살아 남자고 천명이 넘는 동지들을 저승길로 보내고 살아 남았다.

또한 이후에 다시 우익장교가 된다. 그리고 다시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다 보여준다. 어쩌면 한반도 남쪽을 반공으로 도배하는 길만이 자기의 과거를(황군/좌익 등) 은폐하고 숨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기회주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기회주의란 무엇인가를 완벽하게 보여 준 전형적인 인물이다.

속성이 이런데 일본 패망 후 곧 바로 광복군으로 위장하여 합류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을 적극적으로 토벌하던 일본의 진짜군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쥐새끼 마냥 살아 남으려고 광복군 흉내를 낸 것이다.

정말 구토가 나는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행동이다.


⑦ 박정희의 창씨개명 - 조선인 흔적 지우기

일제강점기 시대에 조선인들은 강제로 창씨개명 되었다. 박정희도 예외가 아니어서 창씨개명을 하였는데 그 이름은 모두가 알다시피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이다.

하지만 창씨 개명한 조선인들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창씨개명에는 조선인의 뿌리가 남아있다. 박정희의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다카키 마사오란 이름은 박정희란 조선이름을 응용한 것이다. 다카키(高木)란 성은 고령 박씨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마사오(正雄)란 이름은 정희(正熙)를 변용 한 것이다. 그래서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호칭에는 약간이나마 조선민족의 뿌리가 남아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박정희의 창씨 개명은 여기에서 끝나는게 아니다.

박정희는 일본정신으로 머리 채우고 일본군복을 입고 일본사람보다 일본어를 더 잘해도 핏줄 만은 바꿀 수 없었다. 그는 누가 뭐래도 조선인의 핏줄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박정희는 조선민족이라는 핏줄 끊기를 강행한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이름에서는 조선인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여 다시 작명을 한다. 일본군에 자원입대 했던 것처럼 스스로 작명 실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사용한다.

그 이름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참으로 경악할 박정희의 행동이다. 자작 이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는 조선인의 흔적을 지우고자 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조선인이라는 흔적을 철저하고... 말끔하게... 깨끗히 지우고 완전한 일본인으로 태어 나고자 했던 것이다.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는 진짜 일본이름이다. 이 이름 어디에서도 조선사람의 뿌리를 찾을 수 없다.


⑧ 일본군인 생활에 대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향수

만주군관학교⇒일본육사⇒관동군으로 이어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복무기간은 5년 정도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나이 23세에서 28세까지의 기간이다.

하지만 이 기간동안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몸과 마음을 환골 탈퇴하여 일본인 일본군인이 되어 정서체계와 사고방식 등 모두 일본놈 그 자체였다. 그 증거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나타난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뒤에도 틈만 나면 주일 대사관을 통하여 입수한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관람하고 일본 검도를 즐기는 것이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취미 생활이었다.

또한 당시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씨 등과 청와대에서 술을 마시며 일본천황의 교육칙어를 번갈아 외우는 내기나 시합을 하곤 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엿 볼 수 있다. 그래도 이런 것은 얌전한 행위에 속했다.

다음 글을 읽어보자 압권이다.

[중앙일보. 1991. 12. 14]

[ ..... 계엄선포 한 달 전쯤인가(1971. 10. 17 계엄이 선포되었다) 박대통령이 나를 불러요.(여기서 "나"는 강창성 전보안사령관)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장화에 점퍼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키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이런 미친 인간이 18년간 우리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통치 기간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을 인재로 등용하여 나라를 좀먹고 민족정기를 회복할 수 없도록 망쳐 놓았다.


⑨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1

-. 5.16후 우방 각국에 친선사절을 보냈는데 제일 먼저 보낸 곳은?
답 : 일본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먼저 방문한 나라는?
답 : 일본

-. 최초로 대외정책을 밝힌 기자회견의 주제는?
답 : 한·일 교섭의 재개.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의 망언
일본 방문중 동경의 한 요정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여 동석했던 일본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잘 알고 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것도 유창한 일본어로 말이다.

1963년 12월 17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일본의 자민당 부총재 오노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은 걸작의 말을 한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부자 사이 같은 관계로서 아들의 경축일을 보러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겁다..」라고 하였다.

사실 자민당의 보수 세력은 박정희와 군대생활을 같이 했던 일본제국의 동료 및 상관들이었다.


⑩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2

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을 (한일협정) 성사시킨다. 여기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한다. 박정희는 이때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지배 보상 명목으로(한일경제협력을 위한 지원금) 3억달러 정도를 받는 것으로 끝낸다.

장면 시절의 8억달러나 이승만 때의 80억 달러의 주장에 비하면 너무나 헐값이었다. 일본은 이때 받았던 3억달러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피해 보상은 모두 끝났다고 말한다.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몇 백일을 시위해도 일본은 10원 한푼 내놓지 않을 것이다. 모두 친일파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작품이다.

또한 1973년 서울 지하철 차량부정도입 사건을 저지른다. 일본에서 지하철차량 186량에 대한 매매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일본에서 3,204만엔하는 가격을 6,350만엔이란 두 배 정도나 비싼 가격으로 계약하였다. 이것은 만주군 출신 선배들의 로비와 정치자금의 리베이트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출처 : http://blog.naver.com/mil2511.do?Redirect

by swpaik | 2010/01/10 05:56 | 트랙백

Blood Swear!

박정희, 만주군 ‘혈서(血書)지원’ 사실로 밝혀져
[시사서울] 2009년 11월 06일(금) 오전 00:42  가| 이메일| 프린트
  
 
  
 
만주군관학교 지원 때 “죽음으로 충성” 혈서 사실로 

혈서 “목숨을 다해 충성 다할 각오이다” 만주군 지원 

연구소 “이성적 토론으로 전환하는 계기 삼고자 한다” 

[시사서울] 그간 말로만 전해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주군 혈서지원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가 발굴 공개됐다.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4일 최근 일본에서 입수한 혈서지원 기사가 실린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사본을 공개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인명사전 등재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만주지역에서 발행되던 일본어 신문인 ‘만주신문’ 기사에 의하면 박 전 대통령은 문경에서 교사로 재직 중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하였으나 연령 초과로 일차 탈락하였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지원 서류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와 채용을 간곡히 호소하는 내용의 편지를 동봉하여 1939년 재차 응모한 것으로 나타난다.편지 내용도 일사봉공(一死奉公),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 등 확고한 신념을 담고 있어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세 차례의 시도 끝에 1940년 4월 신경군관학교 예과과정에 입학하여 군사교육을 받고 1942년 3월 우등생으로 졸업하면서 만주국 황제 푸이(溥儀)가 하사하는 금장시계를 은사상(恩賜賞)으로 받았다.

1942년 10월 성적 우수자로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했고 1944년 4월 일본육사 제57기와 함께 졸업했다.1944년 12월 일본군 소위로 예비역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만주국군 보병소위로 임관하였으며, 보병 8단 단장의 부관실에 부임해 작전참모 역할을 하는 을종(乙種) 부관 겸 부대의 단기(團旗)를 책임지는 기수로 근무했다.1945년 7월 만주국군 중위로 진급했다.

연구소가 자료 공개를 결정하게 된 데는 박 전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씨가 지난 10월 28일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을 낸 후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본지가 흐려지고 정치쟁점화하고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다.관련 보도가 나간 뒤 연구소에는 욕설 전화가 끊이지 않아 업무에 지장을 받을 정도였다.

연구소는 특정 정치인의 입지와 무관하게 1991년부터 편찬 작업을 해왔다.그런데도 해방 이후 60년이 넘도록 미결 상태로 끌어왔던 친일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역사적 학문적 정리를 마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진행하고 있는 듯이 왜곡하는 일부 의견에는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근거 없는 비난을 방치할 때 민족사 정립이라는 대의의 진정성이 훼손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연구소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 자신의 언행이 담긴 객관적인 원사료를 공개함으로써 불필요한 논란 확대를 막고, 이성적인 토론으로 전환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고 밝혔다.

한편, 박지만 씨는 4일 북부지원에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에 배포금지를 추가하여 청구취지 및 원인 변경신청서를 제출했다.

앞서 제출한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의 요지는 “1. 박정희는 만주군이었지 일본군으로 복무한 것이 아니며, 2. 만주군의 주적은 마오쩌뚱의 팔로군이었으므로 박정희는 만주국의 용병이 되어 중국공산당과 싸운 셈이며, 3. 조선인 또는 독립군에게 위해를 가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연구소는 “1. 만주국은 일제의 괴뢰국이며 만주군은 일본 관동군의 통제를 받았고 일본군 현역 장교가 직접 지휘하는 경우도 많았다.뿐만 아니라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졸업한 엄연한 일본군 예비역 소위이며, 관동군에서 복무한 시기도 있었다.2. 팔로군도 항일부대이며 중국 소련에 대한 적대행위는 당시로서는 연합군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특히 다수의 조선 청년들이 항일을 위해 팔로군에 복무하고 있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3. 당시의 위관급 장교는 지금과 달리 군이 절대적 우위에 있던 파시즘 국가의 고등관으로서 군수나 경찰서장도 쩔쩔맬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이는 박정희가 군관을 거듭 지원했던 이유의 하나이다.4. 엄밀히 말해서 대일선전포고를 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장에서는 박정희가 적국의 장교이다.5. 박정희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대우와 존경을 받고 안정적인 직업이었던 교직을 버리고 군관의 길을 선택하였으므로, 불가피한 상황으로 볼 수 없고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부일협력으로 이해된다”는 등의 내용으로 변론을 준비 중이다.연구소는 혈서지원 ‘만주신문’ 기사와 함께, 일본군 예비역 소위로서 만주군 장교로 복무했음을 입증하는 자료도 함께 공개했다.

by swpaik | 2010/01/10 03:35 | 트랙백

박정희 일본군장교

일 육사 졸업 뒤 항일연합군 공격 “임정 입장서 박정희는 적군 장교”
[한겨레신문] 2009년 11월 05일(목) 오후 08:11   가| 이메일| 프린트
[한겨레] 민족문제연구소 ‘박정희 친일 행적’ 신문 공개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39년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까지 써가며 만주국 군관을 지원한 사실이 당시 신문 보도로 확인되면서, 만주국군으로 있었던 그의 일제 말기 행적이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8일 내놓을 <친일인명사전>에서 에이(A)4 4쪽의 분량으로 박 전 대통령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연구소 쪽은 다만, 객관적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사전의 속성을 감안해 박 전 대통령의 행적에 대한 ‘평가’는 담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혈서 지원’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도전해, 이듬해 육군군관학교 제2기생 선발 입학시험에서 전체 240명 가운데 15등의 성적으로 합격했다. 이 과정에는 대구사범학교에서 인연을 맺은 관동군 대좌 아리카와 게이이치 등의 도움이 있었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은 “박 전 대통령이 군관을 지원했다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그 과정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며 “그가 혈서까지 썼다는 것은 충격적인 내용”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1942년 3월, 만주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가 하사하는 금장시계를 받는 우등생 5명 가운데 낄 정도로 우수한 성적으로 군관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 10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했고, 1944년 4월 일본육사 제57기로 졸업한 뒤 관동군 제23사단에 배속됐다. 같은 해 7월에는 만주국군 제6군관구 보병 제8단으로 옮겨 소대장으로서 팔로군 공격 작전에 가담했다. 8단은 처음에는 주로 동북항일연군과 소련군과 맞서 싸운 부대다.

조 사무총장은 “그동안 박 전 대통령의 유족들은 일본군이 아니라 만주군이라고 주장했는데, 일본에서 학교를 마치고 예비역 소위로 편입됨과 동시에 만주군으로 임관한 사실이 확인됐다”며 “예비역 소위는 일본군이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는 사실상의 일본군 신분”이라고 지적했다.

박 전 대통령은 1945년 7월 만주국군의 중위로 진급했다. 1945년 8월 그가 속한 제8단은 둬룬으로 진출해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8월17일 싱룽에 집결했지만, 이곳에서 일본이 패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중국 팔로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한 박 전 대통령은 제8단을 따라 베이핑으로 간 뒤 이곳에서 과거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 조선인들을 중심으로 편성된 광복군 제3지대 핑진대대의 제2중대장을 맡았다. 이어 1946년 4월 핑진대대가 해산한 뒤 톈진항에서 미국 수송선에 몸을 싣고 부산항을 통해 귀국했다.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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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paik | 2010/01/10 03:14 | 트랙백

화폐개혁과 북한

북한 화폐개혁 보도 너무 엉터리다” //

시사IN | 정희상 기자 | 입력 2010.01.09 08:53

 

 
"평양에서 인터넷으로 외부 언론의 북한 화폐개혁 보도를 검색해보고는 너무 어리둥절했다."
남북 합작 기업인 평화자동차 총회사를 운영하는 박상권 사장은 북한 화폐개혁 전후 평양에 체류하며 겪은 '황당함'을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말 북한 당국이 단행한 화폐개혁 조치로 주민 불만이 고조됐고, 조만간 소요나 폭동이 일어날 것처럼 보도하는 일련의 한국 언론과 외신 기사들은 그가 보기에 현장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코웃음 자아내는 소설'이라는 것이다. 평양 시내에 보통강호텔과 평화자동차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박 사장은 한국인 중 북한을 가장 많이 오가는 기업인으로 꼽힌다. 지난 5년 동안 무려 161번, 지난해만도 14번 평양에 다녀왔다. 북한이 화폐개혁을 단행한 지난해 12월 초순과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에 평양에 체류하며 시가지와 상점, 시장 등을 둘러보고 왔다는 그를 만났다.





화폐개혁 후 북한 주민이 큰 혼란에 빠져 동요한다는 말과 체제가 붕괴되리라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북에서는 화폐개혁이 아니라 '화폐교환'이라고 부른다. 내가 북한의 화폐교환 후 두 차례 평양을 방문해 돌아본 결과, 그 조치로 인해 북한이 동요하거나 망할 것 같은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화폐개혁으로 망한 나라가 지구상에 있는지도 궁금하다. 마치 주민과 당국 간에 갈등이 생겨 이번 만큼은 북한 정권이 인심을 잃고 굉장히 어려워질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가 많던데 현장은 전혀 다르다. 평양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물건 값이 '100분의 1'로 싸져서 생활에 큰 보탬이 된다"라고 말하며 이번 조치를 반기더라.

화폐개혁 초기에는 상점이나 시장이 일시 마비됐다는 말도 돌았다.

화폐교환 초기인 12월 3일부터 7일까지 평양에 머물며 현장을 조사했다. 정말 외부 보도처럼 북한 주민이 동요하고 피해자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는가 싶어 일부러 시내 상점을 돌아보고 물건을 샀으며, 진열대 상품 사진을 찍고 사람들을 만나봤다. 하지만 폭동이 일어난다든지 소요를 일으킬 기미는커녕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 조치가 당사자인 북한보다는 오히려 외부 세계에 큰 충격과 영향을 미치고 있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북한의 모든 상점은 일시에 문을 닫았다는 것도 사실이 아닌가.

화폐교환 직후에 나는 평양시내 식당에 다니면서 식사도 하고 도매상점에 가서 물건도 사도 피자집에 가서 피자도 주문해 먹었다. 외화 사용에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외화를 취급하지 않는 내국인 상점은 바뀐 돈으로 물건을 팔아야 하기 때문에 12월6일까지 문을 닫은 뒤 다시 열더라. 이것이 (화폐교환 후)초기 평양의 모습이었다. 12월 23일부터 26일까지 다시 평양 시내를 둘러보니, 내화 상점은 모두 물건을 풍성히 쌓아두고 장사를 했다. 하지만 외국인 대상 상점은 평양시내 각 호텔 상점들과 '외교단 상점'인 낙원백화점·평양상점만 문을 열고 나머지 상점은 닫고 있었다.

외화 상점을 닫고 내화 상점으로 물건을 옮겨 파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화 상점 물건이 부족해 외국인 대상 상점 물건을 가져다 위탁판매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내화로 살 수 있는 국내산 농수산물과 식료품, 생필품 등 많은 물건을 넣어서 일반인이 쉽게 사도록 돕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것은 화폐교환으로 대부분 주민의 구매력이 커지다보니 수입 원자재로 만드는 상품 외에, 생필품을 최대한 많이 공급해 주민에게 화폐교환 혜택 효과를 피부로 실감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박상권 제공 화폐개혁 후에도 변함없이 영업하는 평양시내의 피자 가게.

아직까지 북한의 현실과 동떨어진 내외신 보도가 나온다.

많은 사람이 북한 사회를 적대적으로 보듯 화폐교환도 그렇게 보려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인터뷰에 응하는 이유도 누군가는 북한에서 일어나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 남북관계에 불필요한 오해가 없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난해 초까지 김정일 국방위원장 건강 이상설이 돌 때 보수 언론은 '입이 돌아갔다'느니 '다리를 전다'느니 하는 단정적 보도를 내보냈다. 그때 나는 김 위원장과 만날 자리가 있어서 '전혀 이상 징후가 없더라'고 전했지만 믿지를 않았다. 그 뒤 바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방북해 김 위원장을 만나고 '몸이 건강한 편이더라'라고 말하자 비로소 건강 이상설이 잠잠해졌다. 이번 화폐교환 보도도 그런 식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도 출처가 있을 텐데….

만약 불만 세력의 움직임이 있다면 평양이 중요하다. 북한은 평양공화국이라 할 만큼 모든 게 평양 중심이다. 외신은 평양 이외 국경 지방에서 중국을 오가는 북한 주민에게 들었다고 출처를 밝히고 있다. 최근 외신과 한국 언론은 중국 국경 지역에 가서 정보 브로커들로부터 '북한 소식'을 돈으로 산다. 북·중 국경 지역에서는 중국제 휴대전화기가 터지니까, 큰돈을 주고 국경 근방 북한 주민을 매수해 전화기를 들려 보낸 뒤 주기적으로 휴대전화로 소식을 받는 것이다. 문제는 정보 장사를 하는 입장에서 그럴듯하고 쇼킹한 말을 보내줘야만 돈을 많이 준다는 생리를 알기 때문에 엉터리 소식을 보내고, 언론 보도는 사실 확인은 못한 채 그대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종류의 북한 내부 소식은 신빙성이 제로라고 보면 된다.

화폐교환으로 인해 그동안 시장에서 돈을 번 이른바 '장마당 세력' 등이 피해를 입어 불만을 품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경제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화폐교환 과정에서 자기가 가진 돈을 다 못 바꾸는 사람들이 불만을 가질 수는 있다. 하지만 대체 그런 세력이 얼마나 되겠는가. 인플레이션을 확 줄이니 북한 주민 99%는 이번 조치를 환영하면서 희망적이라고 보고 있더라. 돈을 못 바꿔 소요를 일으킬 만큼 장사하는 세력이 많겠는가. 한 집당 10만원씩 바꿔주면 달러로 환산해 3000달러쯤 된다. 국민소득이 불과 수백 달러에 불과한 북한 실정에서 한 집에 3000달러씩 가지고 있는 것은 상당한 재력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민은 화폐교환으로 혜택을 보게 돼 소요사태는커녕, 체제가 더욱 안정될 것이다. 북한 당국도 그 점을 노렸을 것이다.





ⓒ박상권 제공 화폐개혁 후 대혼란설은 외부의 '희망사항'일 뿐, 대다수 평양 시민은 큰 혜택을 입어 표정 관리 중이라고 한다. 위는 2009년 크리스마스 무렵의 평양 거리.

일각에서 후계자 김정은의 이름으로 집집마다 1인당 500원씩 총 1500원 한도에서 새 화폐를 배려금으로 줬다고 말한다.

그런 보도를 접하고 북한 주민에게 확인해봤다. 그런 돈을 받은 적도 공지한 적도 없다며 황당해하더라. 지금까지 북한 당국은 주민에게 후계라는 단어조차 공식 언급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 사람을 거론하며 후계자라는 이름으로 공개적으로 돈을 나눠준다는 게 북한 체제에서 가당키나 한 일이라고 보는가. 한 집당 3명씩 쳐서 1500원씩 배려했다는데, 전부 조작된 이야기로 봐야 한다.

새 화폐의 환율은 어떻게 책정됐나.

화폐 교환을 고시한 북한 당국이 아직까지 달러와의 환율 관계는 공식 발표하지 않고 있다. 그 점이 의아하다. 당초 계획과 뭔가 달라지지 않았겠나 추측이 되는데, 지난 한 달간 대내외 반응과 시장 반응을 체크했으므로 아마도 새해를 맞아 공식 환율을 발표하지 않을까 싶다.

평양에서 외국인이 사용하는 외화는 어떤 기준으로 통용되고 있나.

그동안은 시장에서 형성된 자연적인 환율을 적용하고 있더라. 구권 화폐가 1달러에 3600원이었으므로 신권은 대략 100:1로 축소해 30~36원이다. 내가 12월24일 김정일 위원장 생모인 '김정숙 탄생일' 기념 미술 전시회에 참석했는데 입장료가 새 돈 50원이었다. 달러를 새 돈으로 바꿔 들어갔는데 한화로는 1500원 정도 낸 셈이다. 새해부터는 평양을 방문한 외국인은 달러나 유로화 등 외화만 사용해야 했던 과거와 달리, 공식 환율에 따라 북한 돈으로 바꿔 사용하도록 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분위기로 보면 새해에는 남북 관계가 풀릴 조짐이 있는가.

북한 관계자들 얘기를 들어보면 대남 관계와 대미 관계를 빨리 풀려고 하는 분위기가 잘 읽힌다. 그걸 눈치 채고 미국도 더 얻어내려고 뜸들이고 있고, 한국 정부도 좀더 강경하게 나간 측면이 있어 보인다. 물론 북에서는 과거 남북 양 정상이 합의한 6·15선언과 10·4선언을 현 정부가 무시하고 부정한다며 매우 불쾌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지난 2년간 이어진 남북 관계 공백기는 '계속 이대로 가면 서로 간에 잃을 것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래서 남북 양측이 새해에는 정식 대화를 시작하기만 하면 서로가 조심하면서 진지하고 성실하게 풀어나갈 것으로 본다.

금강산 관광 중단과 개성공단 문제에 대한 북한의 입장은?

금강산은 지난해 8월 현정은 회장이 평양에서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풀어준다는 약속을 받은 사안이다. 이어서 10월 초 정몽헌 회장 추모기간에 현대 측이 금강산에 갔을 북한 아태 부위원장이 '빨리 합시다'라고 채근했다. 북한은 이렇게 두 차례나 허용 의사를 밝혔는데도 남쪽 정부가 막고 있다며 불만스러워한다. 우리 정부는 북한당국이 현대에 말할 것이 아니라 당국간 채널로 공식 제의해올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북한은 아태와 현대그룹 사이의 민간 차원 사업에 정부가 끼어들 수는 없다고 맞섰다. 하지만 관광객이 총격을 받아 사망했기 때문에 우리 정부로서는 신변 안전 문제만은 정부 간 합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런 대립은 오래갈 것 같지 않다. 최근 북한에서는 개성공단관리위원회 남측을 상대로 '금강산관광사업 재개' 뜻을 전달했다고 한다. 이는 사실상 남한 정부가 요구해온 당국 간 제안의 모양새를 갖추려 한 것이다.

북한에서 생산한 평화자동차는 얼마나 팔리며, 사업성이 있는가.

2007년에 350대, 2008년에 650대, 그리고 2009년에 1300대를 팔았다. 차종은 승용차와 승합차, 버스 등 8종을 조립·생산한다. 2008년에는 12인승 버스 '삼천리'가 잘 팔리더니 지난해에는 SUV 차종인 '뻐꾸기'가 잘 나갔다. 순익은 지난해에 약 80만 달러를 벌었고, 올해는 그 두 배를 내다본다. 우리는 평양에서 매년 이익 내는 기업 역할을 해서 향후 북에 진출할 남쪽 회사에 희망등이 되고자 한다.

정희상 기자 / minju518@sisain.co.kr

by swpaik | 2010/01/10 02:29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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